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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을 퍼뜨리기 전에

2015.01.06


재작년에도 그러더니 작년 말에도 몇 사람이 ‘반기문의 송년사’라는 글을 보내왔습니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고...” 이렇게 시작되는 글입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고,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뭐는 어떻고 뭐는 어떻고 계속 대비해서 나열한 글입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이미 2013년에 그런 걸 쓴 적이 없다고 밝혔는데도 ‘좋은 글’이라며 문자로 카톡으로 밴드로 퍼뜨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음 대통령후보 유력설 영입설이 퍼지면서 반 총장의 인기가 더 높아져 그런 걸까요? 에스페란토로 번역해 해외에 알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글을 소재로 칼럼을 쓴 언론인들까지 있습니다.

원작자는 미국 워싱턴주의 오버레이크교회에서 29년간 목회자로 활동한 뒤 1998년에 은퇴한 밥 무어헤드(Bob Moorehead)라는 목사이며 원제는 ‘The Paradox of our Age(우리 시대의 역설)’입니다. 1995년에 발간된 그의 설교 및 방송연설문집 <Words Aptly Spoken>에 실린 글인데, 어떤 자료에는 1990년에 썼다고 돼 있습니다.

그런데 1998년 5월 제프 딕슨(Jeff Dickson)이라는 사람이 그의 ‘Hacks-R-Us’라는 온라인 포럼에 출처 표시 없이 ‘Paradox of Our Time’으로 올리면서 원작자가 왜곡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 1999년 4월 총기 난사사건이 난 미 콜럼바인 고교의 학생이 쓴 글이라거니 냉소적 유머로 인기 높았던 미국 코미디언 조지 칼린(1937~2008)의 글이라거니 논란이 이어졌습니다. 조지 칼린은 암으로 사망한 아내에게 헌정하는 시로 이 글을 인용하면서 자기가 쓴 게 아니라고 했지만 대중은 그의 작품이라며 퍼뜨렸습니다.

웃기는 것은 원작자가 제프 딕슨(Geoff Dixon)이라는 전 콴타스항공 최고 경영자로 알려진 일입니다. 앞서 말한 제프 딕슨과는 영어 철자가 다릅니다. 더 웃기는 것은 호주 기업인 콴타스항공의 전 최고 경영자 제프 딕슨은 1939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사람인데, 우리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1940년 오스트리아 출생이라고 나오는 점입니다. 이렇게 왜곡이 왜곡을 낳고 오류가 오류를 키우고 있습니다. 좋은 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이거나 개칠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알아본 바로는 밥 무어헤드가 원작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가 달라이라마의 글을 가공했을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인도 등지에서는 벽걸이 장식품 등에서 달라이라마의 글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은 달라이라마 어록(http://www.goodreads.com/author/quotes/570218.Dalai_Lama_XIV) 10쪽에도 실려 있는데, 작성연도와 출전은 알 수 없었습니다. 내용은 약간 달라 ‘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적어지고’로 시작됩니다. 달라이라마가 원작자라면 언제 쓴 건지 제프 딕슨이 누군지가 중요한데, 이 두 가지는 확인하기 어려웠습니다. 분명한 것은 반기문 총장의 글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반기문 송년사'의 근거를 따지는 동안 아는 분이 김수환 추기경의 ‘우산’이라는 시를 보내와 읽게 됐습니다.  ‘삶이란/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죽음이란/우산이 더 이상 펼쳐지지 않는 일이다/성공이란/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행복이란/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불행이란/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김 추기경의 글이 아닐 것이라는 의심이 생겨 확인해 보니 양광모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나는 왜 수평으로 떨어지는가>(2012.12)에 실린 작품이었습니다. 원작은 아주 긴데 김 추기경의 글은 상당 부분 생략돼 있습니다. 마지막 대목은 살려 놓았더군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의 우산이 되어 줄 때/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그래서 양광모 시인을 찾아 문의했습니다. 그는 2013년 초쯤 카카오스토리에 시를 줄여 올리면서 축약본이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가 공유· 전파되는 과정에서 축약본이 원본인 것처럼 돼버렸고, 누가 착각을 했는지 김 추기경이 쓴 걸로 알려진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왜곡된 전파의 예는 많습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소위 ‘윤동주의 시’가 마구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뇌성마비장애인 김준엽 씨의 작품입니다.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의 말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중략)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도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인터넷에는 일본어 원문이랍시고 띄워 놓은 게 있는데, 일어 전문가들은 어색하고 말도 안 되는 문장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고르의 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이게 전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마음에 두려움이 없고 머리는 높이 쳐들린 곳 (중략) 나의 마음의 조국 코리아여 깨어나소서’라는 말이 덧붙여졌습니다. 이 대목은 그의 시집 <기탄잘리> 35에 나오는 것으로, ‘저 자유의 천계(天界)에로 주여 이 나라를 깨우쳐 주옵소서’라고 끝나는데, 누군가가 코리아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로 알려진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오래 살다 보면 이런 일(죽음)이 일어날 줄 알았지.” 정도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오역이 퍼져 돌아다닙니다.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입니다.

한 언론인은 최초의 여성화가 나혜석, 여성시인 김일엽 스님과 그의 아들(2014년 12월 입적한 일당스님), 화가 이응로와 본부인 박귀옥 등이 등장하는 수덕여관에 관한 글을 몇 년 전에 읽었답니다. 수덕여관은 충남 예산의 수덕사 앞에 있습니다. 얽히고설킨 사연과 비련이 애절해 그는 이 글을 어느 온라인글방에 소개했는데, 지금 인터넷에는 그가 쓴 글로 떠 있습니다.

어제는 반기문 총장이 페이스북에서 share한 글이라며 아래와 같은 글을 보내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라고 하는 멋진 펜션에 잠시 왔다 가는 여행객들입니다. 적어도 지구를 우리가 만들지 않았고 우리가 값을 치르고 산 것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펜션의 주인은 아니겠지요. (중략) 여행을 소중히 여겨 주세요. 나에게도 딱 한 번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딱 한 번 있는 여행이니까요.'

어떤 블로그에  '펜션에서 일어난 이야기/이세협'이라고 명기돼 있는 걸로 미루어 필자는 이세협이라는 사람이고 취지는 투숙객에 대한 펜션 주인의 당부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분명 반 총장이 쓴 게 아니지만 share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글처럼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share했다는 사실 자체도 의심스럽습니다.

좋은 글이다 싶으면 블로그에 수록하거나 남들에게 일독을 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글의 정확한 근거를 알아보고 출처를 밝히는 게 필요합니다. 자칫하면 본의 아니게 왜곡이나 오류를 증폭 전파하는 잘못에 가담하게 됩니다. 남의 글을 인용할 때 근거를 제시하는 교육을 어려서부터 받지 못한 채 퍼 나르기만 하다 보니 좋은 글 공해에 왜곡 공해까지 쌓여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내가 제시한 정보도 다 믿을 수 있는지 완전한 자신을 하기가 어려워 두렵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 자유칼럼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한국1인가구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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